대구의 독립운동 및 근대사의 기라성같은 인물들

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 <독립운동의 시발이된 국채 1300만원 보상취지문 >

 

구한말 대구가 경제적 요충지가 되면서 경제적 배경에 의한 근대시민활동이 시작되었다. 대구는 수많은 자유사상가와 시인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해 동방의 모스크바로 불리기도 했다.

 

 

이 당시 기라성같은 대구의 인물들을 살펴보자.

 

- 1919년 이여성  '계성학교 학생들을 모아 혜성단을 조직'

- 1919년 제일교회 김태련 '만세운동을 조직하다'

- 1919년: 현정건(현진건의 형) '임시정부 경상도 대표가 되다'

 

 

- 1924년 이장희 '봄은 고양이로소이다를 쓰다'

- 1925년 기생 금죽은 '대구여자청년회를 조직하다'

- 1926년 이상화 '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' 시를 쓰다.

- 1926년 권오설 '6.10만세운동을 주도하다'(대구고보출신)

 

 

 

 

조양회관 민족활동의 중심지가 되다

 

- 1921년 홍주일 김영서 정운기와 함께 교남학교를 설립하다(대륙학교 전신)

- 1922년 서상일이 땅을 내어 조양회관을 세우다.

- 1922년 석재 서병오 교남 시서화연구회를 열다

- 1922년 이인 한국 최초의 조선인 변호사가 되다.

 

 

 

1922년 박태준 한국 최초의 가곡 '동무생각'을 작곡하다.

 

 

- 1926년 이상정 만주로 망명하다.

- 1926년 김울산 명신여학교를 인수하여 복명학교를 세우다.

- 1927년 이원록 정진홍의거에 연루되어 이육사(264)가 되다.

 

 

- 1907년 대구광문사 김광제가 주도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외치다.

- 1907년 박중앙 대구읍성을 허물다.

- 1909년 순종황제 대구를 걷다

 

 

-1909년 김관제 안희제,서상일 등과 대동청년단을 조직하다.

-1915년 화산 박기돈 대구상무소 초대회장이 되다.

-1915년 이시영, 박상진, 윤상태, 서상일 등과 조선국권회북단을 조직하다.

 

 

- 1913년 정재학 구 대구은행을 설립하다(조흥은행계보)

- 1916년 김단야 계성학교에서 동맹휴학을 주동하여 퇴학당하다.

- 1917년 최경학 대구 최초의 서양식결혼을 하다(교남YMCA)앞

 

 

1919년 전후 대구노동학교 춘기 청년회의소 기념사진 1.현진건,2.이상화,3.최화수

 

근현대사를 대표하는 인문들이 대구에서 활동했고 곳곳에 그들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.

 

출처 :대구근대100년 사진전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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